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노 B1 (문단 편집) === [[프랑스 침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1-bis.jpg|width=100%]]}}} || || '''프랑스 침공 당시의 프랑스 육군 소속 B1 bis''' || 전차의 중량이 상당하고 화력과 장갑이 그 당시 수준으로서는 대단했으므로 다른 프랑스제 전차와는 달리 프랑스 본토에만 배치된 중요한 전력이었다. 따라서 실전참가는 [[프랑스 침공]]이 사실상 최초였다. 기병전차인 [[소뮤아 S35]]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구식 사상인 [[보병전차]], 즉 [[보병]]을 지원하는 역할에 치중하는 설계였다. 거기에다 수량도 부족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px1b.jpg|width=100%]]}}} || || '''B1 및 소뮤아 S35의 APX-1 포탑 구조도'''[* bis 이후에는 개량형인 APX-4 포탑을 사용했다.] || 이에 더해서 그 당시 프랑스제 전차의 단점인 '''1인용 포탑'''을 장착해서 포탑에 있는 포를 쏘려면 전차장이 포수와 탄약수까지 겸해야 하는 1인 3역을 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는데다가 승무원 구성이 4~5명인데 전차장(전차지휘, 포탑 주포수, 포탑 탄약수), 조종수(전차조종, 차체주포 조준), 차체탄약수(차체주포 포탄장전), 무전수(무전기 조작 및 포탑의 전차포 포탄을 전차장에게 건네주기[* 단, 포탑이 작아서 무전수가 직접 장전해줄 수는 없었다.])(, 정비병)[* 원래 편성에는 없고 가끔씩만 태웠다.]이라는 직책을 가졌다. 덤으로 엄청나게 느렸다. 게다가 포탑에 있는 전차장용 전망탑(큐폴라)에 해치가 없는데다 관측창이 작아서, 전차장이 외부를 직접 보려면 포탑 후방의 출입용 해치를 열어야 하는 수고까지 있었다. 이 문제는 같은 APX-1 포탑을 탑재한 기병전차 [[소뮤아 S35]]도 가지고 있는 문제였다.[* 그나마 S35는 추후에 포탑 링을 넓힌 APX-1 CE 포탑으로 개수하여 이런 문제는 덜한 편이였다. 물론 포탑 링만 커졌기에 승무원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차체와 포탑을 왔다갔다하느라 통신병이 더 바빠졌다.] 그래서 독일 국방군은 나중에 이 차량들을 노획할 때 출입용 해치를 전망탑에 장착하는 개조과정을 거쳤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 전차부대의 빠른 진격속도를 감안할 경우 그냥 무시당하거나 밥으로 전락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영국군의 [[마틸다 II]]와 더불어 독일군의 인상에 가장 깊이 남은 공포의 연합군 전차'''가 되었다. 둘 다 구식 전차였지만 강력한 방어력을 지녔고, 여기에 더해서 차체의 75mm 포는 [[야포]]였긴 했지만 400m에서 30도 각도의 장갑판 40mm를 관통이 가능했기에 독일의 [[1호 전차]]부터 [[4호 전차]]까지 전부 전면에서 종잇장처럼 찢어버릴 수 있는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차체포의 존재로 포탑의 전차장은 유사시 사용할 선회포탑의 47mm 전차포에 포탄을 미리 장전해 놓은 다음에는 사격 등에 신경쓰지 않고 전차 지휘에 100% 전념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전차의 주행속도는 느리지만 전차의 반응속도는 매우 빨라서 독일군이 당황한 사례가 많다. 당시 독일 국방군의 기록을 보면 B1 bis 1대에 37mm 전차포 탑재형 3호 전차 3대가 줄줄이 터져나간다던지, 37mm [[PaK 36]] [[대전차포]] 일제사격을 가볍게 정면장갑으로 방호한 뒤 75mm 차체포로 반격해서 팔다리가 날아간 대전차포 운용인원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던지 하는 처절하고 끔찍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장갑이 상당한 탓에 일단 길을 틀어 막아버리면 이걸 없애버릴 방법이 [[8,8cm FlaK|88mm 대공포]]나 [[Ju 87|슈투카]] 편대의 항공지원, [[공병]]대의 폭약 밖에 없는 미친 사태가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1bis외르.jpg|width=100%]]}}} || || '''비요트 대위와 B1 bis "EURE"''' || 1940년 5월16일 스톤느(Stonne) 전투에서 외흐(Eure)라는 이름의 B1 bis 한 대가 37mm Pak 36 대전차포 두 문과 [[4호 전차]] 2대, 3호 전차 11대의 독일군 여단 병력 전체를 [[https://worldoftanks.asia/ko/content/contents_center/medal-pedia/Billotte/|모조리 휩쓸며 풍비박산내버린 기록이 있다.]] 이 전차를 조종하던 이들은 제3흉갑기병사단(3^^^e^^^ DCr) 소속 피에르 가스통 비요트(Pierre Gaston Billotte) 대위와 그의 전차병들로, [[모에! 전차학교]] 3권에도 소개되었다. [[월드 오브 탱크]]의 '비요트 훈장'도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비요트 대위는 독일군의 포로로 잡힌 뒤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하여 이후 미국이 [[무기대여법]]으로 제공한 [[M4 셔먼]]으로 갈아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1024780021.jpg|width=100%]]}}} || || '''독일 국방군 보병에 항복하는 B1 bis "Yser"의 승무원들''' || 그러나 구식전차는 구식전차. 보병지원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느린데다가 연료 탑재량도 개량할 때마다 늘리긴 했지만 매우 적어서 활동 가능 시간은 '''잘해봐야 2시간.''' 싸우다보면 연료가 다 떨어지는 일이 많으므로 잠시 싸우다가 곧 후방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그대로 전장의 고철로 버려지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 육군 기갑병과 대장 [[샤를 드 골]]의 반격시 무전기가 없는 것과 함께 드 골의 골치를 아프게 만드는 중요한 문제점이 발생하고 만다. 원래는 부족한 항속거리를 보충하기 위해 800리터의 연료 탱크 트레일러를 견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실용화되지 못하면서 연료탑재량이 부족해진 것이다. 이외에도 [[참호]] 돌파용 목적이지만 [[무한궤도]]가 노출되어 있어서 적의 사소한 사격을 받고 무한궤도 파손으로 기동불능이 되는 일도 많았다. 게다가 설계상의 문제점으로 엔진의 공기흡입구나 냉각장치가 전차 좌측에 있는데다가 연료통의 주입구도 전차 측면에 있어서 측면을 [[집속수류탄]]의 투척을 받거나 37mm [[대전차포]]로 사격하는 등 제대로 공격당하면 그대로 불덩어리가 되거나 엔진이 파괴, 그게 아니라면 연료가 유출되어 없어져서 그대로 멈추는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독일 보병에게 격파당한 B1 bis도 많았다. 물론 당시에도 전면전에 전차만 끌고 가면 약점이 찔리고 찔려 패배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보병과 공군을 같이 운용하며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구현해냈고, 연합군도 비싼 대가를 치러가며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차대전의 악몽에 사로잡혀 [[마지노 선|튼튼한 방어선]] 뒤에서 안주하며 1차 대전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아무 발전이 없던 프랑스에겐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프랑스 전역 당시의 독일 전차보다 강력하기는 했으나, 수는 적은데 그것마저 잘못된 운용으로 조기에 모두 소진해 버리는 바람에 B1 bis 전차들은 프랑스를 구원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